우리 시대의 탁월한 현상학자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은 본래 2018년에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Phenomenology: The Basic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할 수 있는데, 우선 우리말로는 ‘입문’이라는 제목, 원서의 ‘The Basics’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이 책이 현상학을 처음 공부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은 현상학의 엄밀한 개념과 사유의 방향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개념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과 독특성은 현상학의 주요 주제들 및 개념들을 주로 해명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권의 훌륭한 현상학 입문서가 나와 있고 많은 독자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대부분이 현상학을 역사적으로 또는 인물 중심으로 접근한다. 이는 분명 중요한 접근 방식이지만, 현상학이 무엇을 말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하려는 학문인지에 대한 초점을 알려면 또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에 이 책은 현상, 지향성, 세계, 상호주관성, 신체성 등 현상학의 주요 개념들을 하나하나 해명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현상학의 초심자들이 현상학 자체의 주요한 사유와 개념을 익혀나갈 수 있게 안내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한 장(章)이 끝날 때마다 더 읽어야 할 책과 논문을 추천하고 있으며, 책의 끝에 가서 현상학의 주요 개념에 대한 짤막한 용어 설명도 제공한다. 독자들은 본문을 읽다가 가로막히는 개념을 만나게 되면, 이 용어집을 참조하면서 현상학의 실마리를 더 친절하게 잡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은 현상학적 심리학, 현상학적 사회학과 현상학적 정신의학, 그리고 현상학적 질적 연구의 역사와 현황, 그 작업 방식에 관한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동안 심리학과 사회학 등 철학 이외의 다른 분과 학문에서도 현상학적 방법을 활용해 사회적, 심리적 현상을 탐구하는 노력이 있었다. 저자는 이런 흐름을 명확하게 요약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응용 현상학의 미래를 진단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실천의 영역, 또는 본인의 관심 영역에서 현상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현상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학자의 최신 현상학 입문서
저자인 단 자하비는 이런 포괄적인 작업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덴마크 코펜하겐 태생의 자하비는 유네스코 등재 유산이기도 한 후설 문서보관소가 있는 루뱅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코펜하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근래에는 코펜하겐대학교 철학과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옥스퍼드 철학과 교수로 취임해 전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현상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후설 현상학과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 미셸 앙리 등 현상학적 철학자들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내놓고 있으며, 주체성, 타자성, 공감, 수치심 등 전통 현상학에서 소중하게 다루는 주제들에 관한 더 심층적인 연구를 계속 생산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직접 현상학과 심리철학, 현상학과 인지과학, 비판적 현상학 등 다양한 응용현상학 연구 및 현상학의 지평을 확장하는 연구를 몸소 시행하면서 현상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학자다. 그의 장점은 현상학의 난해한 주제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주제를 최대한 명료한 언어로 풀어내고, 이를 다시 응용 현상학의 주제로 확장한다는 데 있다. 자하비의 책은 이미 세 권이 국내에 출간되었는데, 해당 저술 모두 그의 철학적 역량과 통찰을 잘 보여준다. 『현상학적 마음: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입문』(도서출판 b)은 숀 갤러거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현상학과 인지과학의 연관성을 잘 해명한 저작이고, 『후설의 현상학』(한길사)은 영어권 후설 입문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길잡이 중 하나로 꼽히는 책이다. 또한『자기와 타자: 주관성·공감·수치심 연구』(글항아리)는 자하비의 관심 주제 중 하나인 주체성과 타자성 연구를 다룬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저작들 모두 현상학과 주체성, 인지과학의 문제 등에 관심을 둔 모든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좋은 책들이다.
저자의 말대로, 현상학은 일종의 르네상스와도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르네상스에 대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현상학은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핀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만이 아니라 미국, 영국, 아일랜드 등 영어권 국가, 또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현상학이 후설과 하이데거 같은 1세대 현상학자들의 연구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의 프랑스 현상학자들의 독창적인 연구가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음은 물론이고, 그들 이후 세대인 미셸 앙리, 장-뤽 마리옹, 장-루이 크레티앙, 앙리 말디네, 클로드 로마노 등 다양한 독창적인 사상가들을 배출함으로써 현상학에 대한 이해를 더 크게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 1세대 시기에 속하는 망각된 현상학자들, 이를테면 에디트 슈타인이나 얀 파토치카 같은 철학자 및 후설과 하이데거의 미간행 원고가 속속들이 출간되면서 현상학에 대한 이해는 넓어지고 오해는 사그라드는 효과 때문에 사람들의 더 큰 이목을 끌게 된 탓에 현상학의 새로운 중흥기가 도래했다.
현상학의 기초 개념부터 응용현상학의 세계까지 폭넓게 소개
하지만 오늘날 현상학 르네상스의 가장 큰 이유는 현상학이 비단 철학의 영역을 넘어서 앞서 언급한 심리학이나 사회학, 의학 등의 영역, 그리고 최근 주목받고 있는 종교학과 신학, 종교철학 등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참신한 연구를 폭넓게 내놓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언급한 모든 영역은 나름 실증과학이나 통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삼아 새로운 성과를 내놓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연구가 최종적으로 마주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1인칭인 나, 또는 타자, 그리고 나와 타자를 포함한 우리가 일상 안에서 그러한 심리적, 사회적, 의학적, 종교적 현상을 마주할 때 벌어지는 사태이다. 우리 인간이 그저 과학적 성과를 수동적으로 쌓아 올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무수히 일어나는 사회적, 과학적, 종교적 현상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학적 사건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실증과학의 탐구대상으로만 다룰 수는 없다. 거기에서 ‘나’는 어떤 분노, 두려움, 쾌락, 공감 등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고, 많은 경우 이런 체험이 사실상 우리 삶을 추동하는 근원적 의미로 작동하게 된다. 현상학이 더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체험의 의미에 주목하여 실증과학에만 초점을 맞추는 자연적인 태도로는 해소되지 않는 삶의 물음을 추적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 현상학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탐구를 소외시키거나 그와 대립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과학기술의 성과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그러한 성과와 결합했을 때 과학기술의 진보가 주는 삶의 의미를 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현상학이 전개된다.
또한 종교와 신학에서처럼 종교 체험 같이 과학적으로 규명하기에 쉽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분야에 속하는 탐구에서 현상학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신의 초월과 자기-초월의 체험, 신비의 체험은 무엇인가? 전통 형이상학에서 과학주의에서 이런 물음은 자칫 사이비 물음으로 취급되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현상학은 적어도 그런 체험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마땅히 탐구되어야 할 현상학의 주제로 받아들인다. 이 또한 현상학이 많은 이들에게 큰 주목을 받게 된 이유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