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회 2017 신춘세미나
“현상학적 방법에의 도전: 더 근원적인 경험을 향하여”
일시: 2017년 2월 15일(수) 14:00~18:30
장소: 성균관대 퇴계인문관 31609
제1발표: 조태구 박사 (경희대) - 미셸 앙리(Michel Henry)의 구체적 주체성과 몸의 현상학
앙리에 따르면 서양철학사가 이해하고 비판해왔던 주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체에 불과했다. 이렇게 주체가 서양 철학사에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체로밖에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은 앙리가 “존재론적 일원론”이라고 명명한 철학사의 존재론적 편견 때문이다. 앙리에 따르면, 멘 드 비랑은 이런 존재론적 편견에서 벗어나 ‘초월적 내적 경험’인 운동의 존재가 구체적 주체인 자아의 존재임을 밝히고, 이러한 자아의 존재가 곧 몸의 존재임을 이해한 철학자였다. 멘 드 비랑에게 더 이상 몸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이러한 몸은 절대적 내재로 나타나며, 따라서 나의 몸은 세계의 ‘밖에서’, 세계의 나타남 ‘이전에’ 주어진다.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정신을 이 세계에 매개하는 어떤 매개물도 아니며, 정신의 의지를 이 세계에 구현하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몸은 절대적인 내재 속에서 구체적인 체험으로 주어지는 ‘나’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밑에 깔려 있는 것hypokeimenon’ 혹은 ‘밑에 던져진 것sub-jectum’, 즉 주체로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제 1 질료이다.
제2발표: 이철우 교수 (한남대) - 테브나즈(Pierre Th?venaz)의 현상학과 철학적 이성의 조건
충격-경험을 철학적 반성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성은 자신의 자폐성을 자각할 수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오직 이 말씀의 충격-경험에 직면하여, 자신의 고발자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인간적 조건을 받아들일 때만 이성의 자폐성은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성의 탈절대화와 인간적 조건의 자각은 우리를 비합리주의나 회의주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전환을 이룬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을 근본적으로 이의제기하고 있는 경험이 “그 어떤 형태로도 고갈되지 않는, 주의 깊고 역동적인, 구성하는 이성을 자신의 굴곡 안에 숨기”지 않고서, 경험 그 자체만으로 그 어떤 것인들 과연 이의제기할 수 있을까? 제르볼리노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이성이 자기 자신을 문제로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합리주의적 맥락에서 모순으로 보이며, 떼브나즈에 반대하여 가해진, 악순환에 빠진다는 공격을 정당화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만일 우리가 이성 안에 인간 그 자신을 그리고 ‘모순 속에’ 인간 그 자신의 법칙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필요한 추문을 이룬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제3발표: 신충식 교수 (경희대) - 슈어만(Reiner Schuermann)과 궁극(ultimates)의 현상학: 비극적 진리와 정치
정치철학이라는 학문 분야 자체가 다분히 통치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다루는 비극적 사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중심이 뇌나 심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픈 곳’에 있는 것처럼, 정치철학의 핵심 역시 한 시대가 짊어져야 할 비극의 지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릇 비극은 한낱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는 궁극과 궁극의 대립적 충돌에서 발생한다. 나치 체제를 몸소 체험했던 아도르노는 “사상이 개념에 잡히지 않는 궁극을 가늠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은 처음부터 나치 친위대가 희생자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도록 틀어놓았던 반주음악에 불과하다”(Adorno, Negative Dialektik, 1966: 356)라고 했다. 비극적 상황에서 빚어지는 드라마틱한 감성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그 어떤 합리적 지성도 정치철학의 소재로 전환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비극적 진리라 할 수 있는 “고통을 통한 이해”(pathei mathos)를 강조했다. 이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고, 무릇 인간은 행위를 저지르고 나서야 그 결과로 고통을 겪으며 배움에 이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