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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식 회장님 취임사

한국현상학회 회원 선생님께,

 

2021년 새해가 밝아온 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 갑니다.

저는 한국현상학회 신임 회장을 맡게 된 경희대학교 신충식입니다.

신년 한파와 여전히 심각한 코로나 국면에도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4년간 우리 현상학회를 이끌어주셨던 신인섭 전 회장님과 집행부 및 지금도 병상에 계신 이철우 선생님의 그간 노고와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장문의 이임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취임사 역시 신인섭 전임 회장님의 이임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미국 뉴욕에서 현상학 연구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독일어권 현상학과 프랑스어권 현상학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중 프랑스어권 현상학연구 동향을 상세히 다루어주셔서 앞으로 우리 학회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임사 중에서 모든 철학은 파리로또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려고 독일로 가는 시대는 지났습니다라는 표현 등은 일부 회원들에게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유럽적인 현대철학 사조인 현상학이 여러 대륙의 철학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 학문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특정 언어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독일의 3H(헤겔, 후설, 하이데거)를 바탕으로 한 전후 현상학의 부흥은 파리가 아닌 루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후설로부터 현상학을 연구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에 와있던 젊은 신부 반 브레다는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유족들을 설득해 후설의 전체 유고와 장서를 비밀리에 벨기에의 루뱅대학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 설립된 후설아카이브즈는 유럽의 젊은 지식인, 특히 독일어권 현상학자와 미래의 프랑스어권 현상학자의 긴밀한 교류 공간이 되었습니다.

 

초대 후설아카이브즈 소장이었던 반 브레다와 그의 명민한 비서 자크 타미뇨의 기본 방침은 방문객 모두를 무조건 환영하는 문호개방정책”(Politik der offenen Tür)이었습니다. 당시 주요 방문자들로는 란트그레베, 핑크, 가다머, 스테판 스트라서, 루돌프 뵘, 폴크만-슐룩(독일), 발터 비멜(루마니아), 드 발렌스(벨기에), 잉가르덴(폴란드), 파토치카(체코), 레비나스, 메를로퐁티, 장 발, 장 이폴리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폴 리쾨르, 보프레(프랑스), 빌 리처드슨(미국) 등이 있습니다. 현상학의 중심이 벨기에의 소도시 루뱅에서 한때 제국의 수도였던 파리로 옮겨가는 과정은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동유럽과 여러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부터 현상학 두뇌가 파리로 집결된 데 반해서, 독일의 유망한 현상학자들은 주로 영미권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는 심각한 일종의 두뇌 유출이자 동시에 독일현상학의 확장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뉴욕으로 망명간 대표적인 현상학자로는 알프레트 슈츠, 아론 걸비치, 한스 요나스, 한나 아렌트, 헬무트 쿤, 아르놀트 브레히트, 펠릭스 카우프만, 프리츠 카우프만, 쿠르트 코프카, 막스 베르트하이머, 볼프강 쾨엘러 등이 있습니다. 전후에도 프레드 달마이어, 라이너 슈어만, 로돌프 가셰 등 쟁쟁한 현상학자들이 미국에 정착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현상학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컨대, 오늘날의 현상학이 파리로 통하고 있다고 한 말씀은 세 언어권 현상학의 고유하면서도 상호문화적인 교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임 회장의 이임사에 담긴 메시지의 중요성과 민감성을 고려해 이 주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가능하다면 정기학술모임에서 다루었으면 좋겠습니다.

 

1900년 후설이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상학이 중심적인 철학운동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사실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철저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후설 이후 독창적인 현상학 통찰이 그로부터 멀리 벗어날수록 일가를 이루어온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형이상학으로부터 존재역사적 사유에로 이행하는 시대”(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이선일 옮김, 새물결, 2015, p. 25)에 살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행과정에서 현상의 현상성을 엄밀하게 기술하는 데 역점을 두다 보니 현상학 자체가 시대의 비판적 담론으로 나아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임 기간에 저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안점을 두고자 합니다.

 

첫째, ‘X의 현상학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가령, 이임사에서 화두가 되었던 수동성, 시공간의 본래적 구성, 상호주관성, <이념들 2>에 제기된 구성의 현상학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둘째, ‘현상학과 X’를 적극적으로 실행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X는 심학, 뉴로사이언스, 프랑스 현대철학 의제, 약한 사유(weak thought) 등 여러 인접 학문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이러한 두 가지 트랙을 바탕으로 후설의 마지막 저작인 <유럽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과 동시대 하이데거의 문제작 <철학에의 기여>에서 현상학적 비판 문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독일, 스위스, 미국 등의 현상학 거점 대학에서 꾸준히 이루어져 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앞서 아렌트와 르포르의 정치이론을 중심으로 정치와 철학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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