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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 회장님 이임사

이임사를 대신해 그리는 파리의 철학풍경

 

 

선생님들,

 

안녕하신지요지난 4년간의 임기와 회원시절 20년을 돌아보면서 현상학회 회장으로서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우선 2020년 12월 31일 저녁에 작성된 이 메시지는 사정상 오늘 발송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임기 동안 여러 발표자들과 학문적으로 훌륭한 소통을 하였으며 또 임원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임기를 무사히 마치게 되어 저로서는 감사한 마음이 크게 듭니다.

 

특별히 현재 투병 중인 편집이사 이철우 선생님은 지난 2년 동안편집을 마친 파일의 각주처리나 형식통일을 일일이 다시 점검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그리고 현상학회 공지문을 받으시는 모든 익명의 회원선생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회상과 보고 후에 파리를 중심으로 현상학과 철학 일반을 전망하고 그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 이임사를 대신하겠습니다다소 특이한 이임사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회상

 

돌이켜보니 개인적으로는 두 학술대회가 기억에 남습니다그 하나는 총무이사 시절인 2008년 메를로퐁티 탄생 100주년」 기념학술대회로 당시 준비된 발표자료집 150권이 오전 중에 동이나버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회장 첫 임기 두 번째 해인 2018년 칼 슈미트와 21세기 정치현상학이라는 춘계학술대회로 100명에 가까운 연구자들이 예상치 못한 가운데 참석해주셔서 성황을 이룬 기억이 납니다현상학이 세계를 매개로 인간들 사이의 상호신체적 관계를 기술하는 것임을 증명한 두 학회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위의 두 학술대회처럼 회장과 총무시절은 아니지만, ‘현상학회가 3000만원을 밑도는 정부지원을 받아 2009년 제3회 동아시아 현상학 써클〕 PEACE: Phenomenology in East-Asian CirclE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추억은 있습니다.

 

앞으로도 현상학회가 이러한 국제학회를 계속 개최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참고로 당시 정부재원 지원신청서에 사용된 현상학회 직인이 10년 동안 인계되지 못한 듯해서 이번 임기 동안 새로이 마련하였으니 이전 직인을 보유하고 계신 분은 폐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고

 

재선된 임기 2년째인 2020년부터는 현상학회 학술지를 현상학과 현대철학으로 개명하였습니다그 이유는 조금 후 말씀 드릴 프랑스현상학의 동향과 관련이 있으니 참고하시면 충분히 추론하실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그리고 학회의 저술 프로젝트인 현상학의 재발견』 (독일현상학의 가제)을 2021년 봄출간 예정입니다.

 

후설하이데거로부터 핑크와 슈타인을 거쳐 파토츠카와 아렌트에 이르는 10명의 대철학자를 소개한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제 아래 부터는 유럽철학사에 대한 기술로 현상학회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으며 미래도 준비할 수 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모든 철학은 파리로?

 

“Omnes viae Romam ducunt”(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고대속담처럼 오늘의 철학들은 파리로 통하고 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프랑스에서는 고교시절부터 철학을 가르치기에 전 영역에서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지요중세 클래식은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아퀴나스를 위해 이탈리아로 가거나 플라톤을 위해 그리스로 유학하지 않듯이,

 

이제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려고 독일로 가는 시대는 지났습니다강력한 레퍼런스가 프랑스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정상의 논문을 쓸 수가 없으며 니체와 셸링에 대한 연구 역시 독창적인 주석가들이 마지노선 서남쪽에 몰려있어 마찬가지 현상이 됩니다.

 

더욱이 포스트모던 철학에서 필수적인 스피노자를 비롯해 17세기의 보석인 라이프니츠와 말브랑슈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프랑코 폰을 중심으로 연구가 뻗어나고 있습니다그러나 패션이 가장 발달한 도시가 파리이건만 직접 가서 살아볼 경우 유행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듯이,

 

소위 French Theory 진영으로 알려진 Deleuze, Derrida, Foucault, Lyotard도 하나의 학파를 구성해서 지배권을 발휘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습니다프랑스에서 보이는 이 같은 철학의 탕평책이란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고급시스템을 통해 각 분야의 독창성이 분출되는 현상이라 사료됩니다.

 

 

분석철학의 파리 입성

 

지난 세기 중반까지 분석철학이 뚫을 수 없었던 유일한 나라가 프랑스였습니다이탈리아보다도 늦게 수입된 것이지요현상학과 더불어 현대철학의 양대 산맥인 분석철학을 파리에 정착시키기 시작한 이는 메를로퐁티 사후 1962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좌를 물려받은 쥘 뷔유멩(Jules Vuillemin)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대학자로 점점 더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르본대학과 마주하고 있는 오랜 전통의 연구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는 20세기 중반까지 Bergson과 Merleau-Ponty가 가르치던 철학파트를 뷔유멩과 그의 제자 자크 부브레스(Jacques Bouveresse)에게 차례로 맡기면서(1990분석철학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석철학은 현재 부브레스의 제자 티엑슬랑(Claudine Tiercelin)을 통해 콜레주 드 프랑스의 공식철학과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길 건너 파리 1대학에서 논리연구의 후설과 칸트를 거친 포괄적 분석철학자 조슬랑 브누아(Jocelyn Benoist)의 연구반경과 만나고 있습니다.

 

 

교수임용과 방법론적 개인주의

 

메를로퐁티는 1949년 소르본대학으로 떠나면서 리용대학 자신의 자리로 뷔유멩을 부르려 노력했으나 실패하면서 뷔유멩은 클레르몽-페랑 대학으로 갔는데 후일 거기서 후배인 미셸 푸코를 심리학 교수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1961년에 사망한 메를로퐁티의 망령은 1962년 마침내 뷔유멩을 그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좌의 후임으로 이끌었으며 이 뷔유멩은 1970년 장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다시금 미셸 푸코를 부른 것입니다.

 

이리하여 프랑스학자들의 영광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직은 사상사에서 마샬 게루 – 장 이폴리트 – 미셸 푸코로 이어졌고 철학에서는 베르크손 – 메를로퐁티 – 뷔유멩 – 부브레스로 정리되었습니다.

 

모름지기 대학자란 동학 중에서 큰 재목을 알아보고 밀어주는 바메를로퐁티도 그런 역할을 한 것이지요프랑스의 아카데미 분위기는 까다로운 성격의 마리용도 소르본대학으로 모셔갔으며 정년 후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까지 됩니다.

 

메를로퐁티는 저명 철학자 사전의 메인 항목에서 라이벌인 사르트르를 게재했으며젊은 질 들뢰즈와 쥘 뷔유멩을 발굴해서 집필진에 포함시켰습니다아마도 이러한 관용과 여유는 그들이 궁구한 존재의 여백에서 나왔으리라 사료됩니다.

 

 

파리현상학의 성지

 

20세기 전반의 독일고전인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은 세기 후반부터 르네상스 프랑세즈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미국과 호주 등 영어권에서도 프랑스식으로 굴절된 현상학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심오하고 강력한 주석가들이 루뱅과 파리 그리고 리용을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어 각국의 신진연구자들이 모여들고 있는 실정입니다프랑스로 넘어온 현상학은 후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라는 새 베이스캠프를 치고 아래와 같은 그룹들을 형성했습니다.

 

즉 후기의 생활세계를 통해 보완하려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현상학적 개방과 구성을 통해 의식주체의 능동성이 여전히 강한 후설의 전반적인 테제 선험적 현상학을 수술하는 큰 흐름들로는,

 

ⓛ 마리용크레티앙레비나스미셸 앙리가 서로 다른 특징으로 논의를 개진하면서도 후설식 선험주의에는 공히 반대하여 가시적감각적 세계로서 주어진 바’(le donné)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소위 현상학적 실재론〕 그룹

 

② 후설이 의식주체를 일의적으로 삼고위 의 그룹은 주어진 바에 방점을 찍는 반면인간과 세계 사이의 콜라보’ 곧 동위협력(coordination)을 근간으로 하는 메를로퐁티發 누보 리얼리즘 현상학 그룹 (뒤프렌리쾨르로마노 포함)

 

③ 그 외에도현상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후설하이데거메를로퐁티에 대한 데리다의 독창적인 그라마톨로지와 후설과 메를로퐁티를 창조적으로 계승해나간 마크 리쉬르(Marc Richir)의 환타지 현상학이라는 기타 그룹

 

들이 지난 수십 년 간 정착된 상황입니다의 미셸 앙리 등이 수동성을 적극 표방하고 후설이 능동성을 피력하는 동안메를로퐁티는 주체를 포기하지 않은 채 수동성의 토대인 육화된 의식을 모종하기 위해 뇌기능과 동물성 그리고 피아제의 유아심리에 천착했던 것입니다.

 

세기말 자니코(Dominique Janicaud 1937-2002)는 마리용크레티앙미셸 앙리레비나스의 현상학이 부채질한 신학적 전환을 비판했으나 21세기 들어 장-뤽 마리용은 오히려 이 모든 현상학 운동을 다형적 활기〕 Vitalité Multiforme라고 평가하면서 현상학의 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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